![정선의 `하경산수도`. [사진 제공 = 국립중앙박물관]](https://file.mk.co.kr/meet/neds/2020/07/image_readtop_2020_760884_15956036694292267.jpg)

그러나 장마는 생명력이 왕성하게 드러나는 때다. 고려시대 시인 정지상의 애상(哀想)을 돋구었던 강둑의 풀들처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잡초가 우거지며 짙푸른 나뭇잎은 물기를 머금어 손끝이 닿기만 해도 초록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듯하다. 논이며 밭은 말할 것도 없어서 봄을 올챙이로 난 개구리들은 짝을 찾아 소리를 다투고 작물은 대지가 품은 양분을 듬뿍 빨아들여 살로 바꾸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므로 비록 불볕더위가 남았다 해도 장마가 여름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는 여름의 정경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많은데, `하경산수`라고 부르는 그 그림들은 다른 계절을 소재로 한 그림과 달리 특수한 미감을 보여준다.그 미감을 한자어로는 `임리(淋리)`라고도 하는데, 글자대로 해석하면 `축축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모양`이라는 말이지만 동양 서화예술에서는 `생기가 가득한, 넉넉한 풍치`를 뜻한다. 이 말을 눈으로 확인할 만한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겸재 정선이 중년에 그린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를 들 수 있다.
이 그림의 높이는 훤칠한 장정만 해 180㎝나 되기 때문에 보는 이의 시야를 꽉 채운다. 크기만이 아니라 쏟아질 듯한 바위 봉우리, 수백 년 넘은 것 같은 활엽수들, 골짜기를 채운 안개, 급히 내달리던 물살이 확 펼쳐지는 물가의 정경이 짙고 옅은 먹과 녹음의 빛을 머금은 담채로 비단 화폭에 가득하다. 정선은 자기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짙은 먹색과 기운찬 붓질로 마음에 차오른 흥취를 유감없이 그려낼 줄 알았던 작가였다. 그의 여러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장쾌함`은 그 능력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 산수화는 장쾌함과 다른, 여름에만 느낄 수 있는 흐드러진 풍치를 만끽하게 해준다. 한가로움이 품고 있는 넉넉한 물기가 손에 묻어 나올 듯한 흥건함이 그의 필묵의 조화로 재현됐다.
이런 풍광을 사람이 왜 그냥 두겠는가. 누구인지, 복이 억세게 많은 이가 저 가운데 살고 있어, 그는 자기 집 누각에 올라 저 넉넉한 생기를 실컷 즐기는 모양이다. 이 멋진 풍광,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주인,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모습에 표암 강세황도 감탄에 부러움을 담아 한마디 남겼다.
"어떻게 해야 이 몸이 저 속에 들어가 난간에 기댄 저이와 마주 앉은 채 세속을 벗어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
이런 소원이 왜 그만의 바람이었겠는가. 그 마음은 어쩌면 작가 정선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곧 우리 마음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생활인이기 때문이다.
굳이 불가(佛家)의 말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생활인은 누구든 자신이 숨 쉬며 살아가는 세상을 `티끌 속`이라 지칭한다. 그리고 티끌세상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하게 바라기 마련이다. 가본 적이 없어도 그리운 곳이며, 이상향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공간으로 떠나는 여행을 상상하지 않는 이가 누구겠는가! 오래전에 시인 이육사의, 두 손을 함뿍 적실 청포도가 익어가는 7월의 고장 같은 곳은 누구에게나 있다.
동양 서화에서 쓰이는 용어이기도 한 `임리`를 생활인인 우리가 남다르게 느낄 수 있는 면이 바로 그 그리움에 있다. 계절은 여름이나 시국은 메마른 땡볕 아래 땅바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늘 그리워하며 더위를 피해 떠나려던, 생기로 충만한 그곳이 이렇게 멀어질 줄이야 누가 상상했으랴.결핍으로 인한 이 목마름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문화`뿐이다. 오래전부터 동양 산수화는 생활인인 인간의 결핍을 달래주고 채워주는 역할을 해왔다. 그 역할은 시공간의 의미가 달라졌다는 현재에도 변함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다행히 이번주부터 전국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이 문을 연다. 아름다움의 임리가 산과 물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저 공간들에서 체험하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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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4, 2020 at 10:04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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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그림과 글씨이야기] 생명력 가득한 `하경산수`의 세계로 - 오피니언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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