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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June 16, 2020

분단 이데올로기와 한국교회의 신학 -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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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사회에서 분단 이데올로기는 남북 분단 체제하에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념을 뜻한다. 남쪽에서 그것은 강력한 반공주의로 표현된다.

그것은 남북 간 체제 대결의 이념에 그치지 않고, 사회 내의 여러 '분단' 이데올로기를 조장하고 양산한다. 이른바 '남남 갈등'을 조장할 뿐 아니라, 여러 차별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밑바탕이 되고 있다. 예컨대 '빨갱이' 또는 '종북주의자'라는 규정은 모든 합리적·윤리적 판단을 정지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고, 그렇게 특정한 대상을 비인간화하는 논리는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 사회에 '이면 헌법'이 존재한다는 것(백낙청)은 이런 사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기독교가 그 반공주의를 공고히 하고 확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바로 그 점에서 한국 기독교는 남북 평화와 사회적 평화를 이루는 데 기여하기보다는 갈등과 대립을 조장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분단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2.

한국 기독교가 반공주의에 집착하고 극단적 대립의 논리를 펼치는 것은 과연 필연적일까? 종교적 신앙은 보편적 인류애를 지향하여 평화를 이루는 데 기여하는 한편, 자기 완결적 세계관에 갇혀 배타성을 강화하여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는 데 기여하는 모순된 양 측면을 지니고 있다(Gordon W. Allport, <편견>). 우리는 한국 기독교 역사 안에서 양 측면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모순된 양 측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 따라 종교적 신앙이 화해와 평화에 기여하는가 하면 정반대로 갈등과 대립에 기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한국 기독교가 반공주의에 집착하여 극단적 대립을 야기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 자체의 필연적 귀결이라기보다는 한국 현대사에서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흔히 한국 기독교의 반공주의는 '공격적 반공주의' 또는 '행동주의적 반공주의'로 일컬어질 뿐 아니라, 신앙적 교조 수준으로 받들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심지어 '성스러운 반공주의'로까지 일컬어진다(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그 반공주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그 자체로 머물지 않고 우리 사회에 매우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른 기제들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예컨대 친미주의, 교회-국가 유착, 교회-자본 유착 등과 관련되어 있다(강인철). 말하자면 반공주의 외연은 매우 넓고,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매우 강력한 지배의 논리로 작동되고 있다.

3.

한국 기독교의 반공주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 현대사에서의 특수한 조건과 결합되어 형성·확산되어 왔다.

한국 기독교의 반공주의가 주로 월남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강화되어 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윤정란, <한국전쟁과 기독교>). 한국전쟁을 계기로 더욱 강화된 반공주의는 전쟁 후 한국적 근대화 과정에서 명실상부하게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것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단지 교회만의 어떤 사상적 편향에 그치지 않고 한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한국교회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를 뒷받침하였을 뿐 아니라 인적으로 지배 체제와 강고하게 결합되었다는 점은 두말할 것 없다.

전쟁기의 '전투적 반공주의'는 전후 성격이 일정하게 변화되는데, '승공'론의 등장이 변화를 말해 준다(윤정란 등). 승공론은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경제성장을 통해 북한의 체제보다 남한의 체제가 우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점을 요체로 한다. 이로써 반공주의는 단지 억압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몫을 하게 된 셈이다. 전투적 반공주의를 강화한 것이 월남 기독교인들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면, 변화된 반공주의로서 승공론 역시 월남 기독교인들이 제창했다. 이들에 의해 주도된 한국교회가 민주주의를 요구한 4·19를 지지한 것과 동시에, 그에 역행하지만 경제성장을 내세운 5·16을 지지한 것도 그 승공론에 기초한다. 이 일련의 역사적 과정에 한국기독교연합회(현 교회협)가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단지 대결과 억압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둔 반공주의로서 승공론의 대두는, 반공주의 자체의 전화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반공주의의 균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4·19를 거친 후 한일회담 반대 운동, 결정적으로 유신 체제의 등장과 함께 한국교회 한편에서 민주화와 인권 운동, 민중 선교에 적극 나서게 되면서 그 균열은 점차 가시화되었다.

결국 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가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에서 '분단과 증오에 대한 죄책 고백'을 하게 되었을 때, 그 균열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이후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결성된 것은 88 선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한국교회 일각에서 반공주의와 결별을 천명하게 된 것은 88 선언이 그 계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공식적 천명 이전에 이미 반공주의와 결별하게 된 근본적 동인을 부여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더 깊은 탐구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역시 1980년 광주 민중 항쟁이었다 할 것이다. 이후 폭발적으로 분출한 민중운동 과정에서 미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대안적 사회에 대한 모색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광주 민중 항쟁을 계기로 선언적 주체로서 실질적 주체로 등장한 민중을 재발견한 데서, 반공주의의 질곡을 넘어선 전망이 교회 안에서도 확실하게 공유되었다 할 수 있다. 이는 민중신학이 '세대'를 달리하며 변화 발전해 온 궤적을 통해서도 일정 정도 설명될 수 있다.

4.

한국교회 일부가 반공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비로소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신앙적·신학적 지평을 펼쳐 나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나라에 대한 신앙고백을 기초로 하며, 그 구체화로서 이 땅 위에 이루어야 할 대안적 세계의 모색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때마침 1988년 이후 1990년 JPIC 세계 대회가 한국 서울에서 열렸다. 그것은 세계 교회 에큐메니컬 신학의 향방을 제시하는 하나의 계기였지만,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에도 이정표를 제시하는 계기가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한참 지난 후 2013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 제10차 총회가 한국 부산에서 열렸다. 총회 주제는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였다. 처음으로 '정의'가 세계 교회의 주제로 표방되었다. 한국교회는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세계 교회와 호흡하며 신학적 성찰을 발전시켜 왔다. 그간의 시도와 노력 자체를 폄하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교회 자체로 보나 신학적 성찰의 측면에서 보나 그 활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 까닭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러 측면에서 이에 대한 해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의 효과일까? 종교적 운동의 상대적 역할 축소? 여전히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지 않은가? 4·27 이후 희망의 빛이 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속되는 분단 체제의 강고함, 신자유주의 파고로 심화되는 격차와 불평등, 세계 공통의 위기로서 기후변화에 따른 위기의 심화, 사회 한편에 만연해 있는 혐오와 차별 등등…. 교회와 신학이 안고 씨름해야 할 과제들이 없어서 활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한 측면에서의 해명에 지나지 않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적어도 반공주의의 위력이 약화되는(여전히 성급히 말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국면에서 한기총을 비롯한 보수 기독교 세력의 요란한 목소리에 묻혀 버린 효과를 지나칠 수 없다. 여전히 분단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고 있는 교회 행태가 오히려 더 조명되고, 분단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교회의 존재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 상황이다. 전 사회적으로 반공 이데올로기의 강박에 매여 있을 때는 기독교가 방패막이 역할을 맡는 가운데 그 폐해를 넘어서고자 하는 연대의 활력이 살아 있었다. 이제 전 사회적으로 분단 이데올로기의 폐해를 넘어서고자 하는 분위기가 강화된 상황에서 이와 입장을 같이하는 교회는 작은 일부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회적 역할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었지만, 분단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앞서 확인했듯이, 오늘 분단 이데올로기가 문제시되는 것은 그것이 끊임이 또 다른 '분단' 이데올로기를 양산하는 기반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후 보루로서, 한국 사회 보수주의를 뒷받침하는 교회에 성찰의 계기를 부여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한기총이 목소리는 요란함에도 사실상 지지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현상은 극단적 분단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광범위한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그 대안으로 등장한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이 어떤 가능성을 보여 줄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새로운 교회 연합의 등장은 적어도 극단적 분단 이데올로기에 매인 교회가 사회적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것만큼은 방증해 주고 있다. 그 교회의 미래는 과연 얼마만큼 예민하게 시대정신을 읽어 내고 변모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우리 과제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갱신할 뿐 아니라,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과제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나라가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에 걸맞게 우리 사회를 선도해 가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5.

신학이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이루기 위한 교회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려면, 신학의 패러다임을 바꾸겠다는 선언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 사회와 교회가 공통적으로 부딪히는 문제 상황에 집중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실천적 신학하기의 태도가 중요하다. 민중신학이 그저 선언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한국 민중 현실을 주목하고 민중 사건의 의미를 성찰한 데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고, 그 신학하기의 태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계속 강조하지만, 오늘 우리가 분단 이데올로기를 문제시하는 것은, 그것이 남북 간 평화 체제 형성에 걸림돌이 될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여러 차별의 논리를 양산하고 정당화하는 밑바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를 정죄하여 스스로 정당성을 내세우는 고질적 병폐가 한국교회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반공주의 전선은 반동성애·반이슬람·반이주민 전선으로 연장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여러 차례 시도되어 온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 신학은 그 상황을 타개하고,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는 데 기여하는 전망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일찍이 "민주와 통일은 하나"라고 했던 문익환 목사의 통찰은 우리의 실천적 신학의 상상력을 고무한다. 예컨대 사회정의, 생태 정의, 성 정의 등은 각각의 고유한 과제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상호 연관되는 접촉점을 지니는 과제들이기도 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는 단지 소극적 의미에서 전쟁 없는 상태 또는 남북 체제의 공존에 그치지 않는다. 적극적 의미에서 일상 삶의 평화를 기반으로 하고, 또한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면 지금 직면하고 있는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통합적 전망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최형묵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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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16, 2020 at 06:28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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